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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하고 나는 너무나 순식간에(꼴에 또 해본 적 있다고) 백수 수험생으로 돌아갔다. 머리는 질끈 묶고 퀭 해서 다니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상쾌하다. 미래와 시험에 대한 깊은 불안감과는 또다른 면으로 매우 자유롭다. 나에게 오로지 본원적인 목표만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효율적으로 공부하는것과 아이를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것.

공부할때 특히 예전보다는 심플한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예전엔 어리기도 했고 남의 눈이 신경도 쓰이면서 동시에 나도 좀 뭔가 주위 시선을 의식했다. 옷도, 피부상태도 신경썼다.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서 매우 자유롭다. 얼굴은 진짜 그냥 수분크림 하나만 바르고, 머리도 못생기든 말든 그냥 머리띠로 묶어 넘기고 질끈 묶었다. 티는 정말 이도저도 아닌 사이즈의 면티를 하나 입고 바지는 그냥 아무거나 입는다. 내가 편하고, 내가 필요하면 그냥 하는 것이다. 나는 공부의 노예인 자유인이다.

어쩌면 육아 등으로 생존과 보호 본능만 남아있는 '아줌마'들의 일상일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좀 더 목적지향적 삶을 살아서 나는 개인적으로 만족한다. 쓸데없는 데 안테나를 세울 필요가 없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스킬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 심플하게 삶을 살아본 적이 있었는가 싶다. 자잘한 잔가지들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그럴 여유는 없다. 너무 방만한 자유는 나에게 혼란을 주는 편이었다. 어느정도 답이 정해진게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또 퇴사를 하는 과정에서 내 안의 공격성을 깨달았다. 너무 좋았다. 랜선 육아선생님 오은영 선생님도 자신을 키운건 공격성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사자처럼 물고 뜯는 공격성이 아니다. 내가 할 말을 제대로 해내고 자신을 지키는 뭔가 강력한 행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나는 '가마니가 아니다'라는 것.

일단 이 회사 최대 암덩어리였던 내 상사. 상사니까 내가 오냐오냐한거지 다른 데서 만났으면 취급도 안할 인간이다. 일단 뭐 말이 통해야지 싸우든지 하지. 말로 몇번 치고 받다보면 '아 이 사람의 언어체계는 나와 다른 곳에 있다' 그냥 절망이다. 지능과 언어능력은 외계의 것일까 아니면 돌도끼 시대의 어느때에서 진화를 멈춘걸까. 이사람 때문에 퇴사했다고 하는 순간 내가 오히려 인생 루저라 굴욕적일 정도다. 나는 요즘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그의 존재는 미생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고 거길 뛰쳐나갈 생각을 하게 된 시발점이 됐다. 나를 퇴사 전날까지 그야말로 '파이터'로 만들어주고, 내가 실명 거론하면서 그렇게 욕을 하고 다닌 첫 인간인데 생각보다 신났었다. 나도 공격성이 있구나. 좋은 깨달음 줬다.

상사와의 악연이야 그렇다치고, 내가 또 섬뜩한건 주변인의 평가다. 앞으로 사회생활 잘 하라는 인생 계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속으로는 '사람은 좋지만 나랑은 잘 안맞는다' 생각을 해도, 일 적으로는 좋게좋게 말하고 다녔다. 진심이다. 나랑 안맞는 것 뿐이지 업무적으로는 어딜가도 내 명예를 걸고 추천을 해줄거라도 퇴사때까지도 그러고 다녔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이미 일 못하는 사람으로 회사와 관련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말을 하고 다녔더라. 그 사람들이 죄는 아니다. 그사람들이 내가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거고 나도 내 스스로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다니 좀 의외고, 역시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다. 그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와중에 내가 또 욕먹을 인간이 된 것도 나름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뭔가 이런게 있으면 속상하고, 오해를 풀고 싶고, 잘못한거 사과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 이 얘기를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아 쪽팔려' 다음에 '헐 그랬군' 뿐이었다. 나도 이미 살면서 누군가에게 못된사람이었을텐데, 애써 내가 생각하지 않았거나 '나는 결백해 나는 다 잘했는데 너네들이 오해하는거야'의 기조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래 내가 나쁜x이지. 뭐 어쩌겠어. 그땐 나도 그게 최선이었어, 불편했다면 그건 미안'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들의 자유,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의 자유. 어차피 일적으로 만나는건 일 적으로 대하면 되는거고, 그들과 어차피 사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것도 아닌데. 역시, 위의 사례처럼 내가 지금 신경쓸 것 외에 다른건 생각하기도 귀찮다. 이런 것 같다. 내가 지금 생각한 사람들도 다 나름의 인연이 있겠지. 그저 그들과는 인연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편하다. 그리고 저 멍멍이 같은 상사 빼고는, 정말 그래도 지금 좀 서운하긴해도 내가 많이 신세진 사람들이고 그렇게 말하는게 100% 이해된다. 나만 애 있다고 칼퇴를 항상 고수했고 그렇기 때문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감수해야할 몫이 있었다. 내가 이건 인정.

이 모든 굴레 아닌 굴레같은 관계에서 나오게 돼서 후련하다. 여긴 아니었다. 고마운건 많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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