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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외근이 잦은 그분과 딱 둘이(부장은 있든 말든) 있게 됐다. 내가 입사했을때부터 호의적으로 대해주셨던 분이다. 일단 말씀드렸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이다. 내 입장에서는 진짜 초특급 용기였다. 난 원래 누구 얘기를 일부러 듣지도, 내가 일부러 내 얘기를 하지도 않는 성격이라(극소심) 뭔가 '얘기 한판 할까요'하는걸 해본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근 나는 굉장히 붕 떠 있었다. 아마 나에게 호감이 딱히 없는 일반적인 상사였다면 나는 이미 지적을 몇번이나 받았을 만 하다. 하긴 부서 특성상 근데 누가 누구를 지적할 상황은 아니었다. 제각기 갈 길이 너무나 달랐고 남의 일을 케어하는 것은 그 아무리 직속 상사라도 월권과 같이 여겨졌다. 이 구조가 나는 또 숨이 막히긴했다. 모두 각각의 사업의 PM인데 이게 좋게 말해 PM이지 완전 분업 제로에 비효율 끝장판이었다.

사유는 조금 뭉개서 말했다. 뭉갰다기 보다 사유 10개중 제일 중요한거 한개를 제외하고 9개를 말한 셈으로 볼 수 있다. 상대를 굳이 믿지 못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건 아니었다. 그런데 또 굳이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건너건너 공부한다고 그만두는 사례가 드물게 있긴하다. 진심으로 나는 그런 사람들의 도전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사례로 알려지는건 부담.

차장님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다. 담담이 들어주는 것에서 인생의 내공을 느꼈다. 최근에 느낀게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단 한 문장이라도) 들어주는게 참 힘들다는 것이다. 친한 사이인데도 내 말을 항상 자르는 느낌을 받으면 잘 말을 안하게 된다. 그런데 이분은 담담하고 차분히 들어주시는걸 이번에 제대로 느꼈다. 그분은 아이가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내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워킹맘의 고충이라든지 그런걸 충분히 생각해보시고 공감해주셨다. 놀라웠다. 고마웠다. 앞으로 사회에서 다시 어떻게 만나든, 나도 도움되는 인간이 돼야겠다고 느꼈다.

다른 분들도 그런 점이 한 둘은 있다. 이 회사는 그래도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사람을 말이다. 그 누구보다 심적으로 편하게 느낄만한 사회친구들을 얻었고, 동료로서 지냈던 전우들이 남았다. 살면서 추억과 에피소드를 공유할 것이고 그건 무르익어서 더욱 재밌어 질 것이다. 그걸로 같이 또 오래오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인생 한 부분에 대해 같이 수다도 떨 것이다. 그런 점이 너무 좋다.

그리고 사회생활에 대한 자잘한 팁도 얻었다. 조직이라는 생태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내가 언젠가 중간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경우 진짜 이딴 짓거리만큼은 하지 말자. 다 못해도 이것만은 잘하자 같은 것이다. 난 어떤 부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데 바로 이 부장때문에 이 원칙들이 생긴 것이라고 봐도 좋다. 중간에서 이간질과 정치질을 하는것에 너무 질리고 놀라서 '아 회사에서 기술이나 특기가 없으면 저렇게 살아남아야 하는구나'하고 나에게 전문 자격자가 돼야함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인생에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라도 사회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다. 인간성이고 뭐고 다 떠나서 업무적으로 정말 최악이었다.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분들을 만나서 행복하다. 지금 갑자기 퇴밍아웃하듯이 되긴 했지만 내 심적으로는 이미 올해 1월에 퇴사한 느낌이다. 퇴사가 무르익었다. 너무 물러서 익어 터지기 전에 빨리 이제 나와야한다. 원래 5월 말까지 하려던게 6월말이 됐다. 회사에서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인사해야할 분들이 많다. 인사해야할 분이 많다는것도 감사하다. 이익 집단에서 내가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았던 것 같다.

 

나의 첫 퇴밍아웃을 축하해주는것 마냥, 얼떨결에 내손에 들어온 행사용 꽃다발

매우 큰 걸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완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제 나는 끝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다시 새로운 형태로 얻었다. 근데 이럴때마다 뭔가 그래도 기회는 온다고 믿는다. 비워야 새로운게 채워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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